
데킬라라는 것이 사실 용설란 원액을 증류해서 만든, 원래 비쌀 이유가 없는 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는 항상 고가를 자랑하곤한다지. 기네스 흑맥주가 그렇고 보드카 중에서도 앱솔루트나 루스키 스탕다르트 등은 확실히 그 가격이 납득이 가잖아. 원래 싸구려라고 하는 진만 해도 탱커레이나 봄베이 사파이어같은 브랜드가 그러한 진의 고급스러움을 잘 보여주고 있잖아.
그런 의미에서 Anejo. 즉, 데킬라의 3등급인 실버-레포사도-아네호로 이어지는 등급순에서 가장 숙성이 오래 인정받을 수 있는 최상의데킬라는 나도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마셔봤던 술들 중에서 두 번째로 비쌌던 술. 첫 번째는 로얄 살루트 21y였는데 항상캐주얼 위스키를 끼고 사는 나에게, 국내 정발도 안 되고 가격만 해도 남대문 보따리 주류시장에서 15-20만원 상당 하는 술을 내가 어떻게 마시겠어. 사실 선물받고서도 고민이 컸는데.
마침 미국에서 날아온 후배 김민규군이 그래도 내 생일이라고 이런 비싼 술을 선물해줘버렸다... 선물받은걸 팔 수도 없고 하는 노릇이라, 이번에 내 교환학생 서류 수속때 해석과 번역을 도와줄 외대 이미나양에게 반쯤 뇌물 겸 해서 따다 바치게 되었다. 덕분에 나도 마음먹고 맛을 볼 수 있었어. 후에 조금 남겼다가 다른 친구들도 나누어줄 수 있었고.

지금까지 마셔본 데킬라래봤자 페페로페즈, 호세 꾸엘보 이스페셜, 레포사도, 사우자 정도지만 이번에 마셔본 빠뜨롱의 경우에는 진짜 이것이 데킬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마치 위스키를 마시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점이 특징이었다. 일단 처음에는 슈터로손등에 레몬즙과 소금을 바르고 털어넣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기본적으로 아가베 특유의 아련하고 토속적인 향은 남아있지만 다른데킬라들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움과 위용을 자랑하는 느낌. 적어도 가격을 확실히 납득시킬 정도였다. 감안해서 안주를 간단하게 차리긴 했지만.
같이 마셨던 이들도 다 더없이 깔끔하고 다음날 숙취가 전혀 없다고 했으며, 확실히 가격값은 할 정도의 데킬라. 다만 데킬라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그다지 취향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데킬라는 확실히 없는 맛에 마시는 술인데 거기에 관해서 고급을 찾는다는게 조금 애매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급이라는 것은 역시 어느 지역 어느 때, 어느 분야에 대해서도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음을 확인해볼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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