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1일 화요일

사랑받는 소녀를 위해 은반지를 깎아보았다.




매우 평범하고 일반적인 메시지 링. 다만 귀금속 공예보다는 기본적으로 실버클레이 공예를 상정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살짝 투박함이 보이는 정도의 메세지 링이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그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해서 광 내다 보니 실버클레이로 한 거 같기도 하고 그냥 귀금속공예로 깎아서 한 것 같기도 하고.... 매우 애매하지만 그래도 의미정도는 잘 전달되었잖아.

애초에 취미로 하는거고 이걸 해본 것도 고등학교 이후 접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일단 내가 최근 밀어주고 있던 어떤 커플중 소녀를 위해서 이걸 깎고. 그 소녀의 생일날 직전 남자애가 이걸 손가락에 끼워주게 되어있었는데 내 여자친구도 아니고 딴 놈의 여자친구를 위해서 이걸 신나게 깎고 굽고 두들기고 있었던 나는 존나 OTL 쓰잘데없이 착한 것 같아. 


가운데 박힌 0.3캐럿 페리도트는 원래 가는 난발짜리 난집을 달고 거기에다 박아넣을까 했는데 두꺼운 메시지링에 그래봤자 의미도 없고 돌출부위가 부러지거나 훼손되기 쉬워서 아예 함입하는 식으로 묻어버렸다. 마감이 살짝 너저분하고 페리도트가 잘 보이지 않지만 저런 식으로 묻어버리듯이 박으면 아무리 험하게 사용하더라도 절대로 페리도트가 빠지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지. 

사실 내구성 생각한다면 92%짜리 스털링 실버를 구해서 깎아서 쓰는 것이 더욱 변색과 마멸에 강하고 질기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99.9 순은이 가공도 편하고, 조금 쉬이 변색되기는 하지만 어차피 나중에 다시 광을 낼 수 있잖아. 처음 시작하는 첫사랑 커플인데다가 아직 처녀 총각들이니까 기왕 은으로 깎을 반지라면 순은이 더 의미가 크지 않겠어. 


반지에 새겨진 문구. 맨 처음 초안이 이거였어. 'HZ는 HR를 사랑한다' 라는 정도의 뜻. 게르만 룬으로 깎아냈고 이게 다 들어갈지 어떨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맨 위에 줄은 삭제하고 메세지만 줄로 존나게 벅벅 문질러서 깎으니까 간신히 저게 들어갈 자리는 확보되더라고. 조금 투박하지만 룬 자체가 원래 돌판이나 나뭇가지, 토판에 투박하게 깎아 새겼던 문자니까 나름 괜찮을지도. 


밖에서는 비가 돋나게 오고 있었어... 끼울 아가씨 손가락이 10호니까 열소성 공정이 끝나면 크기 줄어들거 상정해서 16호 사이즈 목봉에 감아서 조금씩 건조시키고. 차근차근 티저로 깎아나가는 공정. 사실 실버클레이를 메세지링으로 만드는 것 보다 박박 긁어서 새기는 게 더 빡셌던 것 같다... 그런데 원래 강사님도 그러더라고. 메세지링은 새기는 작업이 제일 귀찮고 오래걸린다고. 그래서통생 맨 처음에 생긴 글자보다 나중에 새긴 글자가 날아다니게 마련이라고. 


최종건조가 끝나면 조심스럽게 목봉에서 링을 분리한 뒤 열소성 공정에 들어가. 아직은 산화은 비슷한 하얀 모양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나노입자 수준의 은이기 때문에 전도성은 여전하거든. 바로 높은 온도에 올리면 깨져버리니까 낮은 온도부터 차근차근.보통은 쇠그물로 고여서 열이 올라가는 수준을 조절하고는 해. 가스불꽃이라 보이지는 않지만 사진에는 버너의 불에 페리도트가 열을 받아서 푸르게 빛나는 것이 보일거야. 


가장 높은 온도가 600도쯤 되던가... 쇠그물을 밑장까지 빼고 최고 화력으로 올리면 이렇게 은은 하얀 상태 그대로고 주변의 철망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해서 멋지다. 덧붙여 이거 찍다가 나 앞머리카락 태워먹음.... 돈 버리고 시간까지 버려가며 이 짓 하고 있는데 앞머리까지 태워먹다니 아 진짜 나란남자 ㅠㅠㅠㅠㅠ 슬프다. 진짜 그 둘이 내가 고생한 만큼 잘 되기나 해 주었으면. 

소성은 마쳐도 아직 겉에 묻은 재는 그대로라 광택이 나지는 않아. 일단 조금 식힌 뒤에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면 그 때부터 광내기작업에 들어가는거지. 식힐 때 만약 페리도트를 박지 않고 그냥 메세지만 새겼더라면 물에 던져넣어서 빨리 식히기도 하고 담금질 효과로 더 질기게 만들 수 있지만 보석을 박았을 때 그런 짓을 하면 깨져버리기 십상이므로 그냥 철망 위에서 천천히 식힌다.

은은 어떤 금속보다도 열이나 전기전도성이 뛰어나므로 열소성 공정때도 금새 온도가 올라가고 반대로 냉각시킬때도 금새 내려가므로 식을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이런 은의 전도성은, 사포질을 조금만 해도 반지를 잡고 있는 손이 쉬이 따뜻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지. 사실 전도성이 좋은 것은 귀금속들의 특징이라... 구리, 은, 금, 백금 전부 다. 


자. 열경화가 끝나고 위에 쌓인 재만 살짝 털어낸 사진. 드디어 금속같아보이지? 아직 광은 안 내서 되게 투박해보이지만 이것을 차츰차츰 깎고 문질러서 반지처럼 보이게 하는거야. 맨 처음에는 굵은 사포와 밀링스톤으로 문질러서 튀어나오거나 울어난 부분을 깎아내고 갈수록 눈이 고운 사포와 광약을 사용하여 고급스러운 광택을 내는거지. 

사실 모든 귀금속은 클레이 아트를 하는 느낌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일단 열경화 이후로는 그게 불가능하니까 여기서부터는 깎고 문지르고 쪼아내 모양을 만드는 귀금속 공예의 영역에 들어가. 나 같은 경우에는 모습이 변한다는게 느껴져서 여기에 목숨을 거는 편. 

글씨 부분이 그냥 음각이라 잘 보이지가 않거든. 메시지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저렇게 깎아낸 글씨인데. 이 상태에서는 진짜 돌려서 찍는 도장으로 쓸 정도로 잘 파였지만 누가 반지를 그렇게 써... 'ㅅ' 그러니까 글씨가 잘 보이도록 에폭시나 매니큐어를 깎아낸 사이로 채워넣어서 글씨를 완성하는거야. 메세지링에서 가장 잘 쓰이는 방법이네. 사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파인 부분만 유황처리를 해서, 황화은은 검은색을 띄게 되니까 결국에는 은색인 부분과 달리 눈에 띄게 되거든. 그런 식으로 편하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안에 채워진듯한 느낌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안에 흑색 매니큐어를 채우는 방법으로 마감했어.

....물론 그리고 후회했지. 다 마치고 나니까 유황변색 공정이랑 별 다를것도 없게 되어버리더라. 그럴 줄 알았으면 괜히 이쑤시개 잡고 낑낑거리면서 채워나갈게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유황 수용액에 던져넣어 황화시키고 다시 광을 내는 편이 더 편했을텐데;; 


그런 식으로 가장 고운 눈의 사포까지 문대는 공정을 끝마쳤으면 반지의 모서리 부분에 날이 강하게 서있을거야. 빨리 끼다가 손가락 베이면 낭패를 보게 되니까 거기도 마저 문질러서 둥글게 갈아버리고 마지막으로 광약을 바르고 부드러운 천이 새까매질때까지 문질러 최종적으로 완성. 솔직히 말해서 정말 서툴게 손으로 깎았다는거 티가 나긴 하지만 애초에 이거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고 반쯤은 취미, 반쯤은 친한 이들에게 해 주는 노가다인데 뭐 어때 -_ -;; 억울하면 느이덜이 깎든가. 


그리고 이반지는 이렇게 케이스에 담겨서. HZ라는 친구가 HR 양의 생일이 되는 늦은 밤. 그래. 말복 전날인 오늘의 심야에 그녀의 손가락에 프렌치 키스와 함께 전해졌단다. 첫키스의 맛은 여름밤의 시원한 보드카 토닉 맛. 첫사랑들이 맺어지기는 힘들다지만 나는 그 힘든 사랑이 이루어져서 훗날까지 이야기되길 기대해보고 있어. 진심으로 너희들이 행복하기를. 언젠가 세계에서 가장 열혈한 과학자가 될 사람이 깎아주었던 반지가 너희에게 의미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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