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1일 화요일

내 캐릭터리티는 영어만 있는 게 아니야.




기분나쁠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참 기분 묘하고 찝찝한, 이 회사에 입사한 지 서너달 지나고 나서 느낀 느낌인데. 점점 내 캐릭터가 외국어로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 회사에서도 그랬지만 생뚱맞게 캐릭터가 외국어라는게 무슨 뜻이냐면, 회사에서 외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라인 근로자들 중에서는 나 말고 없어 외국어로 말하는게 내 캐릭터가 되었단 이야기. 

아악 씨발 영어 싫어 존나 싫어

....요~런 포스팅을 했던 것이 불과 3년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 대화할 때 복잡한 문장도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말할 수 있고 너무 지나치게 특수전공적이고 전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면 문제없이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니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지만, 영어 말고도 내 캐릭터가 될만한 것들은 얼마든지 많은데 회사사람들 다 나 하면 떠오르는게 영어밖에 없어 맨날 나에 대해 이야기 하면 영어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오고 말을 걸어도 꼭 어떻게 배우느냐 어디서 배우느냐 하는 것밖에 없으니 난감하다. 한국사회에서 외국어라는 것이 얼마나 파워나 경외의 대상이 되는지도 깨닫게 되지만. 

하긴 특례질하면서 는 것이 푼돈이랑 영어밖에 없긴 하지. 

맨 처음에 입사했을 때, 영어나 일본어 회화를 구사할 수 있다고 면접에서 이야기했을 때 토익점수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게 미심쩍어하고 실제 그렇다더라도 라인 근무자가 외국어를 할 수 있어봤자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냐는 눈치였는데 요새는 아주 다양하게 써먹힘 당하고 있다. 주로 해외인력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울 시 불려가서 통역해주는 정도인데 이건 이전 회사랑 똑같은 느낌, 필리피노들이 캄보디안들보다는 더 편하고 알아듣기 쉬운 영어를 구사해서 편하긴 한데 나는 영어는 배웠어도 통역을 배운적도 없고, 분쟁의 소지가 있는 대화를 통역해주면 양쪽 다 나한테 화내기 때문에 난감해... 난 해석해준 죄밖에 없는걸.

어제만 해도 다리 근육통때문에 오늘 잔업을 빠지고 싶다는 외국인 이야기 통역해주는데 조장님은 나한테 화내고 또 필리피노는 나한테 하소연하고[...] 결국 오늘 일 끝나고 음료수 하나 사주면서 난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한 죄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뭐 납득해주니 그나마 고맙지만... 여기의 외국인들은 전 회사에 있던 외국인들보다 영어를 더 잘 하는 편인데 이전 회사에 있을 때처럼 같이 뒹굴며 지내는 게 아니라서 좀 더 멀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이전 회사 외국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지금도 그렇게 술 많이 마시고 지내고 있을까. 

...

회사에서 누군가 들어오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인사받거나 할 때 보면 다들 이미 날 알고 있는 것은 좋다. 다만 꼭 뒤에 [아- 그 영어로 말하던] 이 붙는 것이 기분나쁘지는 않지만 유쾌하지도 않아서 기분 미묘하다. 일하는 사람들 면면을 보면 이전에 기계일 할 때보다 다들 특색이 있긴 한데 나는 다른거 다 빼고 그냥 학교다니다 온, 영어 할 줄 알고 몇 달 뒤에 특례 끝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 뭔가 다른 일을 할 사람같은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약간의 호남사투리 억양과 낮고 둔탁한 말투 때문에 심지어는 외국에서 살다 왔다는 루머도 있다는 건 지난주에 처음 알았다. 설비팀 형이 이야기해줘서 알았는데 지금까지 내내 호주에 있다가 병역때문에 한국 와서 특례 때우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는 듯, 물론 전혀 아니라고 이야기해줬지만 또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거야 -

뭐랄까 학교다니는 친구들 보면 사실 나 같은 건 그냥 의사표현만 할 수 있다 뿐이지 아예 모국어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 친구들이 얼마든지 많은데 내가 그런 시선을 받으니 기분 좋으면서도 내 이미지나 자아로 누군가에게 보여줄만한게 그거 말고는 전혀 없는건가 싶어 찝찝하기도 하고 요즘은 그냥 그런 느낌이다. 얼마든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자랑할만한 것이 외국어 말고도 많은데 역시 가장 보이는 것은 능력이 될 만한것밖에 없네. 하지만, 그래도 별로 걱정은 안 하는게 -

- 얼마 안 가서 금세 묻힐거라는거. 이전 회사에서도 얼마 안 가 당연한게 되었잖아? 

...

그래도 난 지금에는 만족 못 해.
특례만 끝나면 모은 돈으로 어디든지 떠날거야.
외국어를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렇게 배운 외국어로 무엇을 하느냐가 목표인 곳으로. 

지금은 죽어버릴 것 같지만 이제 311일 남았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참자. 

by. Ster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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