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도 사진만 보면 아주 그냥 이가 갈린다. 사흘에 이어졌던 폭설의 여파로 길은 진창이 되고 시계는 악화되어 불과 전방 50미터 앞의 불빛도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는 함박눈. 더구나 바이크를 뒤집어 엎을 기세로 불어닥치는 미친 바람까지 곁들여져 배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추워 죽겠는데도 식은땀이 줄줄 기어나오는 상황이었다.
그걸로만 끝나면 모르겠는데, 대체 왜 그럴까. 사람들은 눈이 오면 기를 쓰고 피자를 더 시켜대고는 한다. 꼭 다른 배달음식이 아니더라도, 짜장면도, 치킨도, 보쌈도 아닌 피자를 유독 기를 쓰고 시켜댄다. 첫눈 오는 날 모여서 먹을만한 음식이라거나 첫눈 오는 날은 꼭 모여서 뭘 해야 되는, 그런 지독하고 짜증나는 상징주의로 점철된 국민성 뭐 이런 개소리를 꺼내봤자 사실 그걸 배달해야하는 내 입장에서 이 악물고 하는 그냥 내 편/불편에 대한 불평이지만, 생각해보면 그냥 다른 사람 끼니 갖다주는데 내가 먹지도 않을 그 끼니에 대해 목숨 걸고 진창에서 기어야 되니까 화딱지가 뽀글뽀글 치솟는 것이다.
비 정도까지는 어떻게 좀 추워도 맞으면서 배달할 만 하다. 헌데 눈이 오는 날은 다르다. 4개면이 접지되어 정지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자동차와는 달리 바이크에 있어서 애초에 미끄러지라고 만든 기종이 아닌, 지면에 대한 타이어의 트랙션을 전제로 만들어진 바이크의 경우 지면에 대해 마찰을 잃는다는 것은 생명의 위협에 바로 직결된다. 그것을 아는 라이더들 입장에서는 속도를 마음대로 낼 수도 없어 결국 가장 먼 배달구역까지도 최대 시속 40km를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_ -;; 문제는 그러면 피자가 식는다;!
결국 배달 한 개 늦게 갔다오게 되면 뒤에거 밀리게 되고 그거 다녀오면 피자가 식고 그러면 그거 컴플레인때문에 또 가야 되거나, 누구 넘어져서 다치거나 못 나오게 되면 또 상황은 악화되고, 결과적으로 뒤에 나오는 것은 천년만년 언제 배달되는지 하릴없이 기다려야 되는 상황이다 보니 시킨 고객들도 지치고 우리들도 지치고 다들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환상의 악순환이 완성되는 것이다.
...
그런 이유로, 어제도 나는 완성하지 못한 시험과목의 키워드를 곱씹는 것도 잊고 최대한 지면과 시야에 집중하면서 거북이같은 주행을 하고 있었다. 자꾸 부츠에 눈이 기어들어와 발가락에는 감각이 없고 불어닥치는 눈이 쉴드를 비집고 들어오거나 쌓여서 쉴새없이 손가락으로 털어내야 했다. 간신히 멀리 간판 불빛이 보여 안도하고 쉴드에 뭍은 눈을 털 때였다. 잠깐 눈 앞이 블랙아웃 되더니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닥에 턱을 괴고 엎어져 있는 것이었다.
잠깐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멍해졌다가 곧 정신을 차려 일어나려고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넘어진 바이크에 몸과 안쪽 정강이가 깔려 운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악악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더니 매장에서 매니저와 다른 팀메이트들이 뛰어나와 곧 바이크를 일으켜 세워줬다. 그렇게 간신히 일어나서 내게 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나는 으레 바이크 운전자들이라면 겪는, 더할 수 있는 사고의 공포에 대해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곧 털고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그 날도 계속해서 피자를 실어 나르고 욕먹고 그래야 했다.
다음날인 오늘. 정작 넘어진 어제는 그닥 아프지 않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니 오른쪽 정강 바깥쪽 뼈와 어깨 안쪽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으레 이런 사고들이 그렇지만 다음날이 되어서야 아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곱씹으면서 나는 또 일을 하러 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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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 하는 이유에 대해 결국은 다들 돈 버는 것도 느이덜이 성인인 이상 선택한 것이 아니느냐고 다들 말하곤 한다. 다행히 나는 이렇게 공부하는 짬짬이 일을 하면서도 어느정도 장학금 받아 학교 다니기에 어렵지 않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러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일을 하는 것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사실은 나와 같이 일하는 다른 대학생 팀메이트들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장 눈 앞을 메꾸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도 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2012년도 국가장학금 신청이 시작되었다. 나야 가뿐히 받을 수 있는 성적을 유지했을 뿐더러 사실 성적이 아니라 집안 형편으로만 계산 때려도 충분히 장학금이 나오겠지만 기본적으로 장학금인 만큼 성적순으로 자르겠다는 마인드는 사실 형평성에 위배되지 않는가 생각해보곤 한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공부해서 장학금 받는게 이득이라는 사실은 이제 모두가 안다. 문제는 당장 다음 학기 장학금을 위해 숨만 쉬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치열하게 학교다니면서 일까지 해야 하는거겠지.
있는 집 애들은 학비도 부모님이 다 내주고 당장 먹을 것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여기저기 무급인턴도 하고 자원봉사도, 연수도 다녀오고 그렇게 살면 그게 스펙이 되어서 나중에 척척 취직도 잘 되고 먹고 살 길도 많다던데에. 헌데 대학교 다니는 내내 등록금에 치여서 당장 다음학기 등록금 만드느라 공부도 못하는 친구들은 어떨까. 방학때도 일만 하느라 정신이 없고, 어떻게 졸업장 따서 스펙이든 뭐든 만들어보려고 생각하면 다들 그런다지, 딴 놈들이 이 정도로 할 동안 너는 그것도 못하고 뭐 했느냐고.
최소한 그 따위로 내게 물어보는 새끼 싸닥션이라도 올려붙이고 당당하려고 나도 어떻게든 공부 계속해나간다지만, 어느 새 대학 졸업이 과정이 아니라 목표가 되어버린 우리네 친구들 인생도, 그리고 이런 삶이 있는지도 모르는 친구들도 암담하다. 사실 이런 삶이 있다는 사실을 동정받고 싶지는 않지만 친구들이 알기라도 해 주었으면 하고 기대는 해 보지만 그 친구들은 사실 이런거 걱정은 고사하고 알 가치도 없어. 누구나 자기 일이 가장 중요한 법인데, 당장 대학 등록금이나 생활비 만들어야 하는 우리들의 삶의 무게가 그들이 가진 무게보다 딱히 무겁다고 생각하지도 않을테니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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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지만. 내가 과학자가 되어 잘 될 수 있느냐 물어보면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 한심하다. 두고 보자. 언제까지 이 나라가 그렇게 파이의 크기만 키우는 경제에 매달려서 잘 될지. 파이를 쪼개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사상누각이 언제까지나 잘 될지 나는 진심으로 걱정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by. Sterlet.
제발 부탁인데, 이걸 읽는 친구들이 있다면 눈 오는 날 만이라도 배달음식 시키지 않아주었으면 한다. 비 오는 날까지는 어떻게 참고 견딜만 하지만 눈 오는 날은 단순히 견디고 말고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 부디 한 끼 정도, 끼니 정도의 관용을 베풀어, 등록금 걱정 많은 너희 또래들을 배려하여 나가서 먹거나 차려서 식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부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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